철새들이 순천만을 유독 좋아하는 이유

8,180마리. 2025년 겨울, 순천만에 도래한 흑두루미의 수입니다. 역대 최대 기록입니다. 전 세계에 남아 있는 흑두루미의 절반 이상이 해마다 이곳을 찾습니다. 한반도에는 천수만도 있고, 낙동강 하구도 있고, 한강 하구도 있는데, 왜 하필 많은 철새들이 순천만을 찾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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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 24, 2026
철새들이 순천만을 유독 좋아하는 이유
올겨울, 시베리아에서 출발한 흑두루미 떼가 한반도 남쪽 끝자락에 내려앉았습니다.
'끼루룩—' 하는 울음소리가 갯벌 위로 퍼지고, V자 대형을 이룬 무리가 하나둘 날개를 접습니다. 거의 날갯짓 없이, 바람만으로 활공하며 내려오는 새.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탐조객들 사이로 감탄이 새어 나옵니다. 순천만의 겨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8,180마리.
 
2025년 겨울, 순천만에 도래한 흑두루미의 수입니다. 역대 최대 기록입니다. 전 세계에 남아 있는 흑두루미의 절반 이상이 해마다 이곳을 찾습니다. 거기에 기러기, 오리, 노랑부리저어새, 검은머리갈매기까지 — 희귀조류 48종을 포함해 총 252종, 연간 약 10만 마리의 새가 이 습지에 머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한반도에는 천수만도 있고, 낙동강 하구도 있고, 한강 하구도 있는데, 왜 하필 많은 철새들이 순천만을 찾는 걸까요?
철새는 감상으로 여행하지 않습니다. 수천 킬로미터의 비행은 생존을 건 선택이에요. 그렇다면 순천만에는 다른 곳에 없는 무언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3겹의 순환

갯벌과 갈대, 그리고 미생물
 
답을 찾으려면 순천만의 구조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순천만이 특별한 이유는 단치 경치가 아름다워서만이 아닙니다. 갯벌과 갈대와 미생물이 하나의 순환 고리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고리. 갯벌이 만드는 자연 밥상

 
‘순천만은 동천, 이사천, 해룡천’
 
이 3개의 하천이 남해 바다와 만나는 하구에 자리합니다. 밀물과 썰물이 하루 두 번씩 드나들며, 22.6㎢(약 690만 평)에 달하는 광활한 갯벌을 뒤집어놓습니다.
 
보통 남해안의 갯벌은 모래 성분이 많은데, 순천만은 다릅니다. 하천이 상류에서 실어온 미세한 점토질 퇴적물이 두텁게 쌓여 있습니다. 이 기름진 펄 위에서 플랑크톤이 자라고, 플랑크톤을 먹고 짱뚱어, 농게, 칠게, 밤게, 맛조개 같은 저서생물이 번식합니다. 어류 230종, 게 193종, 새우 74종, 조개 58종 — 순천만 갯벌은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식탁인 셈입니다.
 
밀물이 바닷물 속 영양분을 실어 오고, 썰물이 다시 순환시키는 이 리듬이 멈추지 않는 한, 식탁은 매일 새로 차려집니다.
 
순천만 습지 갯벌 생물들 @순천만습지
순천만 습지 갯벌 생물들 @순천만습지
 

두 번째 고리. 갈대는 '청소부'

 
동천과 이사천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순천만까지, 약 3.5km에 걸쳐 70ha(약 21만 평)의 갈대 군락이 이어져 있습니다. 키 2~3m로 빽빽하게 자란 갈대숲. 가을이면 황금빛으로 출렁이는 이 풍경이 순천만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갈대숲은 풍경이기 이전에 기능입니다.
 
갈대의 줄기와 잎은 수면 위 태양광을 차단해 조류(藻類)의 과잉 성장을 억제합니다. 뿌리는 물속의 질소와 인 같은 영양염류를 직접 흡수하죠. 뿌리 주변의 펄흙 속에서는 수많은 미생물이 유기물을 분해합니다. 갈대가 물의 속도를 늦추고, 부유물질을 가라앉히고, 미생물이 나머지를 처리하는, 그야말로 자연이 설계한 천연 정수 시스템입니다.
 
실제로 어떤 효과가 있을까요?
 
순천만 갈대 군락의 상류와 하류 두 지점에서 수질을 측정한 결과, 질소와 인은 약 40%, 화학적 산소 요구량(COD)은 약 32%가 감소했습니다. 주변에서 생활하수와 농업폐수가 계속 유입되는 상황임을 감안하면 대단한 수치입니다. 갈대 뿌리가 흡수하고, 펄흙 속 미생물이 분해하고, 걸러진 물이 다시 갯벌로 흘러갑니다.
 
해양환경 전문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10㎢의 갯벌이 가진 수질 정화 능력은 인구 10만 명 도시의 하수 종말처리시설과 맞먹는다고 합니다. 순천만의 갈대밭은 사람이 설계한 어떤 시설 없이도, 매일 이 일을 하고 있는 셈.
 
순천만 갈대숲 @순천만습지
순천만 갈대숲 @순천만습지
 

세 번째 고리. 먹이사슬이 완성하는 순환

 
정화된 물이 기름진 갯벌 위에 퍼지고, 갯벌은 풍부한 저서생물을 키우고, 그 생물들이 철새의 먹이가 됩니다. 흑두루미는 밤에는 갯벌에서 잠을 자고, 낮에는 주변 논으로 날아가 떨어진 낱알이나 풀뿌리, 작은 동물을 먹습니다. 갈대숲은 개개비나 붉은머리오목눈이 같은 작은 새들에게 둥지와 은신처를 제공합니다.
 
갯벌이 먹이를 만들고, 갈대가 물을 정화하고, 철새가 영양분을 다시 농경지와 갯벌로 순환시킵니다.
 
어느 하나가 빠지면 고리가 끊어집니다. 순천만의 힘은 이 세 겹의 순환이 온전히 살아 있다는 데 있습니다.
 
숲만이 순환하는 것이 아닙니다. 갯벌과 갈대밭도 스스로 정화하고, 걸러내고, 다시 돌려보내는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청소'는 무언가를 없애는 일이 아니라, 다시 흐르게 하는 일이죠.
 

사람이 비켜서자 일어난 일

 
그런데 순천만이 처음부터 이렇게 건강했던 건 아닙니다.
 

📌 한 눈에 보는 순천만 리빌딩 타임라인

  • 1990년대 초 : 동천 하구는 쓰레기가 쌓인 방치된 땅. 골재채취 사업으로 개발 위기
  • 1996~1997년 : 최초 생태조사 → 흑두루미, 황새 등 국제적 희귀 철새 발견. 갈대 군락의 정화 기능 확인
  • 2006년 : 국내 연안습지 최초 람사르 습지 등록
  • 2009년 : 흑두루미가 전봇대·전선에 걸려 죽는 사고 발생 → 순천시, 전봇대 282개·전선 12,000m 철거. 비닐하우스 철거. 오리농장 이전
  • 철거 전 167마리 → 2024년 7,600마리 → 2025년 8,180마리 (출처: 순천시, 한국NGO신문 2025.8, AI타임스 2025.11)
  • 2021년 :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등재
 
1990년대 초, 동천 하구는 쓰레기가 쌓인 방치된 땅이었습니다. 1993년에는 골재채취를 겸한 하도정비 사업이 추진되면서 갈대밭이 통째로 사라질 위기에 놓이기도 했습니다. 시민단체와 주민들이 반대에 나섰고, 1996년에야 최초의 생태조사가 이루어졌죠.
 
결과는 뜻밖이었습니다. 흑두루미, 황새, 검은머리갈매기까지. 국제적으로 희귀한 철새들이 이미 이곳을 찾고 있었고, 갈대숲의 정화 기능이 과학적으로 확인된 순간이었습니다.
 
순천만 습지 개발을 반대하는 사람들 @순천만습지
순천만 습지 개발을 반대하는 사람들 @순천만습지
 
그 후로 순천만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순탄하진 않았습니다. 순천만을 람사르 습지나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자는 움직임이 알려지자, 재산권 제약을 우려한 일부 주민들이 갈대밭에 불을 놓는 일도 있었습니다.
 
보전과 생활 사이의 갈등은 깊었습니다. 행정기관과 시민단체, 주민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야 했습니다. 일본 이즈미시의 두루미 서식지와 홍콩 마이포 습지를 함께 둘러보며 "공존"의 모델을 찾았고, 2003년 순천만협의회가 구성되면서 비로소 대화의 틀이 잡혔습니다.
 
2006년 국내 연안습지 최초로 람사르 습지에 등록되었고, 순천시는 순천만 주변의 오리농장과 음식점 등 환경 오염시설을 철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2009년이었습니다.
 
흑두루미가 전봇대와 전선에 날개가 걸려 다치거나 죽는 사고가 반복되자, 순천시는 과감한 결정을 내립니다. 순천만 주변 농경지의 전봇대 282개와 전선 12,000m를 모두 철거하기로 결정합니다.
 
비닐하우스를 치우고, 4차선 아스팔트 도로를 잔디길로 바꿨습니다. 주민들은 흑두루미영농단을 조직해 59ha의 농경지에서 친환경 경관농업을 시작했죠. 가을 수확이 끝나면 들녘을 통제해 새들이 안심하고 먹이를 찾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사실 사람이 한 일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전봇대를 뽑고, 비닐하우스를 치우고, 한 발 물러선 것뿐입니다. 순환을 방해하는 것들을 걷어낸 것.
 
그러자 숫자가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전봇대 철거 전 167마리에 불과했던 흑두루미가, 해를 거듭하며 3,400마리, 6,000마리, 7,200마리로 늘었고, 2024년 7,600마리, 2025년에는 역대 최대인 8,180마리를 기록했습니다.
 
6년간 자취를 감췄던 천연기념물 황새가 다시 나타났고, 남해안에서는 처음으로 저어새 서식지가 무인도에서 보이기 시작합니다. 2021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다시 말해,
순환을 방해하는 것을 멈추자
자연이 스스로 답을 찾아낸 겁니다.
 

가장 정직한 인증서

 
흥미로운 변화가 하나 더 있습니다.
 
흑두루미는 경계심이 매우 강한 새예요. 사람이 150m 이내로 다가오면 바로 비상합니다. 그런데 지금 순천만에서는 탐조대에서 70~80m 앞까지 다가와 유유히 먹이를 찾는 흑두루미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을 피하지 않고 공생을 시작한 겁니다.
 
전문가들은 이 변화가 단순한 개체수 증가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고 말합니다. 흑두루미가 넓은 지역으로 분산해 먹이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은 서식 공간의 질이 고르게 향상되었다는 뜻.
 
전 세계적으로 습지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멸종위기종이 안정적으로 개체수를 늘린 사례는 국제적으로도 드문 일입니다. 무엇보다 인간 활동에 대한 경계가 낮아졌다는 것 자체가, 서식지 관리 체계가 20년 넘게 일관되게 작동해왔다는 증거입니다.
 
순천만 습지를 날아오르는 흑두루미 @순천만습지
순천만 습지를 날아오르는 흑두루미 @순천만습지
 

그리고, 순천만만의 ‘일관성’

 
순천만이 다른 철새 도래지와 구별되는 건 바로 이 일관성이에요. 농업과 행정, 시민사회가 함께 참여하는 구조가 20년 이상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장기 모니터링 자료가 축적되었고, 도시 개발보다 생태 보전을 우선하는 정책 기조가 이어져 왔습니다. 한 번의 이벤트가 아니라 순환적 관계의 축적. 순천만의 환경 관리 체계가 국내 최초로 국제 학술지(SCIE)에서 과학적으로 인정받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철새가 돌아온다는 것. 이보다 더 환경이 건강해졌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을까요? 어떤 성분 분석표보다, 어떤 인증 마크보다 정직한 평가입니다. 철새는 자신이 머물 만한 땅을 기가 막히게 압니다. 순천만은 새들이 직접 보증하는 깨끗함을 가진 곳입니다.
 

깨끗함이 흘러가는 곳

 
순천만의 갈대가 하는 일을 한마디로 줄이면, "오염물질을 제거하고 자연으로 되돌려보내는 것"입니다. 깨끗함의 끝이 또 다른 오염이 아니라, 다시 순환의 시작이 되는 것.
 
자연의 정화 시스템은 어쩌면 우리가 보호하고 관리해야 할 연약한 존재가 아닐 수 있습니다. 미생물은 유기물을 강력하게 분해하고, 갈대는 끈질기게 뿌리를 뻗으며, 밀물과 썰물은 하루도 쉬지 않습니다. 강인하되, 흔적을 남기지 않죠. 그것이 자연이 보여주는 깨끗함의 방식입니다.
 
그래서 "깨끗하게 한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때를 벗겨내는 것으로 끝나는 깨끗함이 아니라, 그 이후까지 이어지는 깨끗함. 과정의 끝이 순환의 시작이 되는 깨끗함. 순천만의 갈대가 그러하듯, 아마 그것이 진짜 깨끗함에 더 가까울 겁니다.
 
순천만이 30년에 걸쳐 보여준 과정과 결과는 결국 하나의 원리를 깨닫게 해줍니다.
 
순환을 방해하지 않으면
자연은 스스로 회복한다는 것.
 
전봇대를 뽑는 일은 대단한 기술이 아니었습니다. 방해물을 치우고, 흐름을 되돌려주었을 뿐입니다. 갈대가 오염물을 정화하는 것도, 밀물이 영양분을 실어 나르는 것도, 특별한 장치 없이 자연이 원래 하던 일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흐름을 끊지 않는 것. 어쩌면 우리 일상의 깨끗함도 같은 원리일지 모릅니다.
 
올겨울에도 흑두루미는 돌아왔습니다.
 
시베리아에서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
정확히 같은 곳으로.
순환이 살아 있는 곳으로.
어쩌면 철새는 매년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곳은 여전히 깨끗한가?"
 
그리고 내려앉는 것으로 답합니다.
우리가 만드는 깨끗함은, 무엇을 돌아오게 하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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