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억 5천만 년의 조용한 수호자, 이끼가 지구를 돌보는 방식

이끼는 공룡보다 먼저 지구에 존재했습니다. 꽃이 피기 전, 씨앗이 생기기 전, 나무가 하늘을 향해 뻗기 전부터 이끼는 텅 빈 바위 위에서 흙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묵묵히 지구의 순환을 돌보고 있습니다. 가장 작은 것이 어떻게 가장 오래된 지혜를 품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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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 26, 2026
4억 5천만 년의 조용한 수호자, 이끼가 지구를 돌보는 방식
숲길을 걷다 보면 발밑에서 가장 먼저 우리를 맞이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축축한 바위 위, 오래된 나무 그루터기 아래, 그늘진 땅 위를 촘촘히 덮고 있는 이끼. 우리는 이 작은 식물을 대개 지나쳐 버립니다. 너무 작아서, 너무 흔해서,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끼는 공룡보다 먼저 지구에 존재했습니다. 꽃이 피기 전, 씨앗이 생기기 전, 나무가 하늘을 향해 뻗기 전부터 이끼는 텅 빈 바위 위에서 흙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묵묵히 지구의 순환을 돌보고 있습니다.
가장 작은 것이 어떻게 가장 오래된 지혜를 품을 수 있을까요?
 

지구 최초의 개척자

 
약 4억 5천만 년 전, 지구의 육지는 생명이 없는 황량한 바위뿐이었습니다. 물속에서 살던 조류가 처음 육지로 올라왔을 때, 이끼는 그 선두에 있었습니다. 영국 왕립식물원 큐가든의 기록에 따르면, 이끼와 그 친척뻘인 우산이끼, 뿔이끼는 지구상 가장 오래된 육상 식물 그룹에 속합니다.
 
공룡이 등장하기 2억 년 전의 일입니다. 꽃 피는 식물이 나타나기 훨씬 전부터, 이끼는 맨바위 위에서 조금씩 분해되며 최초의 흙을 만들었습니다. 다른 식물이 뿌리내릴 수 있는 토대를, 이끼가 먼저 준비한 것입니다.
 
이끼에게는 뿌리가 없습니다. 물을 끌어올리는 관도, 영양분을 운반하는 조직도 없습니다. 대신 '가근'이라 불리는 가느다란 실 같은 구조로 바위나 나무에 몸을 붙이고, 빗물과 공기 중의 영양분을 온몸으로 흡수합니다. 단순합니다. 하지만 그 단순함으로 이끼는 사막부터 극지방까지, 지구의 거의 모든 대륙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전 세계에 약 12,000종에서 25,000종의 이끼가 존재합니다. 이들이 덮고 있는 면적은 약 940만 제곱킬로미터, 캐나다 국토 면적과 맞먹습니다. 이 작은 식물이 어떻게 그토록 오래, 그토록 널리 버텨왔을까요? 그리고 지금, 이끼는 지구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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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를 품는 작은 숲

 
2023년, 호주 뉴사우스웨일스대학교의 데이비드 엘드리지 교수와 스페인 세비야 자연자원·농생물학연구소의 마누엘 델가도-바케리소 박사가 이끈 국제 공동 연구팀이 놀라운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16개국 수십 명의 과학자가 참여한 이 연구는 전 세계 6대륙 123개 생태계에서 이끼와 토양의 관계를 조사했습니다.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었습니다. 이끼가 덮인 토양은 이끼가 없는 맨땅보다 약 64억 3천만 톤 더 많은 탄소를 저장하고 있었습니다. 이 수치는 삼림 벌채, 도시화, 광업 등 전 세계 토지 이용 변화로 인한 연간 탄소 배출량의 약 6배에 해당합니다. 작은 이끼가 인류 활동 6년치의 탄소를 품고 있는 셈입니다.
 
이끼는 어떻게 이토록 많은 탄소를 저장할 수 있을까요?
 
나무처럼 광합성을 통해 대기 중 이산화탄소를 흡수합니다. 하지만 나무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이끼는 천천히 분해됩니다. 나뭇잎이 떨어져 금방 썩어 없어지는 것과 달리, 이끼의 조직은 분해를 억제하는 화학물질을 품고 있어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토양으로 스며듭니다. 그 과정에서 탄소가 땅속에 갇힙니다.
 
특히 북반구의 이탄지를 구성하는 물이끼(Sphagnum)는 수천 년에 걸쳐 탄소를 축적해왔습니다. 스톡홀름 레질리언스 센터의 연구에 따르면, 물이끼가 형성한 이탄층은 지구 전체 토양 탄소의 상당 부분을 품고 있습니다. 이 조용한 습지가 지구의 '탄소 금고' 역할을 해온 것입니다.
 
연구팀은 경고도 함께 전했습니다. 만약 지구상 이끼 분포 면적의 15%만 훼손되더라도, 방출되는 탄소량은 현재 인류가 토지 이용으로 배출하는 연간 탄소량과 맞먹거나 그 이상일 수 있다고. 이끼는 단순히 탄소를 흡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쌓아온 지구의 탄소 균형을 지키는 수호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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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소를 만드는 보이지 않는 공장

 
이끼가 하는 일은 탄소 저장만이 아닙니다. 북방 침엽수림에서 이끼는 또 다른 역할을 수행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협력자와 함께.
 
이끼 표면에는 시아노박테리아, 흔히 남세균이라 불리는 미생물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이들은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기 중 질소 기체를 식물이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바꾸는 것. 이 과정을 '질소 고정'이라고 합니다.
 
2013년 Frontiers in Microbiology에 발표된 한 연구에 따르면, 북방 침엽수림에서 이끼와 시아노박테리아의 공생체가 고정하는 질소는 해당 생태계 전체 질소 유입의 최대 50%에 달합니다. 연간 헥타르당 2킬로그램 이상의 질소가 이끼를 통해 토양에 공급됩니다. 이는 비나 눈을 통해 대기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질소량과 비슷한 수준입니다.
 
질소는 식물 성장의 핵심 영양소입니다. 단백질을 만들고, 엽록소를 구성하고, 생명 활동 전반을 지탱합니다. 북방 숲은 토양이 산성이고, 기온이 낮아 영양분이 부족한 환경입니다. 이런 곳에서 이끼는 공기 중의 질소를 붙잡아 토양에 선물합니다.
 
이끼는 스스로 영양분을 만들어 주변 식물과 나눕니다. 숲이 푸르게 자랄 수 있는 것은, 이끼가 조용히 운영하는 '영양 공급 시스템' 덕분이기도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장이 숲 바닥에서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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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품고, 흙을 지키다

 
비가 내립니다. 빗방울이 땅에 떨어지면 흙을 때리고, 물길을 따라 토양을 쓸어갑니다. 경사진 곳에서는 더 심합니다. 표토가 씻겨 내려가고, 영양분이 함께 사라집니다. 토양 침식은 전 세계적으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이끼가 덮인 땅에서는 다른 일이 일어납니다.
 
이끼는 자신의 건조 무게보다 10배에서 20배의 물을 머금을 수 있습니다. 비가 내리면 이끼는 스펀지처럼 물을 빨아들이고, 천천히 토양에 내려보냅니다. 2024년 Biologia 저널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이끼가 덮인 토양은 맨땅에 비해 표면 유출이 91% 감소했습니다. 토양 손실은 거의 100% 방지되었습니다. 동시에 땅속으로 스며드는 물의 양은 85% 증가했습니다.
 
이끼의 촘촘한 구조는 빗방울의 충격을 완화합니다. 물이 토양을 직접 때리는 대신, 이끼의 부드러운 층을 통과합니다. 가근은 흙 입자를 붙잡아 경사면에서도 토양이 쓸려 내려가지 않도록 합니다.
 
포도밭에서 진행된 또 다른 연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끼를 복원한 구역에서는 표면 유출이 71% 감소하고, 토사 유출이 76% 줄어들었습니다. 이끼는 건조한 여름에도 토양 수분에 부정적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폭우 때는 침식을 막아주었습니다.
 
자연은 댐을 짓지 않습니다. 거대한 방벽을 세우지 않습니다. 대신 이끼라는 작은 담요로 물의 흐름을 조절합니다. 물을 머금고, 천천히 내려보내고, 흙을 지킵니다. 순환의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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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요람

 
이끼 한 뭉치 안에는 하나의 우주가 있습니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이끼 사이사이에서 수많은 생명이 살고 있습니다. 미생물, 곰팡이, 선충류, 작은 절지동물들이 이끼의 촘촘한 구조 속에서 먹고, 번식하고, 삶을 이어갑니다. 이끼는 온도와 습도를 조절해 이들에게 안정적인 서식지를 제공합니다. 여름에는 토양을 시원하게 유지하고, 겨울에는 단열재 역할을 합니다.
 
새들은 이끼를 둥지 재료로 사용합니다. 부드럽고, 보온성이 좋고, 항균 성분까지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양서류 중에는 이끼 위에 알을 낳는 종도 있습니다. 이끼가 만든 습한 미세 환경이 알이 마르지 않도록 보호해주기 때문입니다.
 
이끼가 형성한 토양 환경은 더 큰 식물이 뿌리내릴 수 있는 토대가 됩니다. 산불이 휩쓸고 간 자리, 광산 개발로 황폐해진 땅에서 이끼는 가장 먼저 돌아와 흙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이끼가 준비한 토양 위에 풀이 자라고, 관목이 들어서고, 나무가 뿌리를 내립니다. 생태 복원의 첫 번째 단계를, 이끼가 조용히 시작합니다.
 
숲의 바닥에서, 이끼는 생명의 요람 역할을 합니다. 가장 작은 존재가 가장 많은 생명을 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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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가 전하는 순환의 메시지

 
이끼는 화려하지 않습니다.
빠르게 자라지도, 눈에 띄지도 않습니다.
꽃을 피우지 않고,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하지만 4억 년 넘게 지구와 함께 살아오며, 이끼는 순환의 본질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탄소를 품습니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천천히 토양에 저장합니다. 질소를 만듭니다. 공기 중의 질소를 붙잡아 식물이 쓸 수 있는 형태로 바꿔 토양에 선물합니다.
 
물을 머금습니다. 빗물을 흡수해 천천히 땅에 내려보내며 침식을 막습니다. 흙을 지킵니다. 맨바위 위에서 흙을 만들고, 토양이 쓸려 내려가지 않도록 붙잡습니다. 생명을 품습니다. 수많은 미생물과 작은 동물에게 서식지를 제공합니다.
 
그리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이끼가 죽으면 천천히 분해되어 토양의 일부가 됩니다. 자신이 품었던 탄소와 영양분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줍니다. 아무것도 버려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다시 쓰입니다.
 
스코그링이 숲에서 배우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흐름입니다.
 
과정까지 깨끗한 순환. 끝까지 자연으로 돌아가는 흐름.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것들이 이끼처럼 지구에 부담을 남기지 않고, 조용히 제 역할을 다한 뒤 순환의 고리 안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떨까요?
 
이끼는 작은 존재가 큰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눈에 띄지 않아도, 꾸준히 제자리에서 순환을 이어가는 것. 그것이 이끼가 4억 년 동안 지구를 돌본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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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발밑의 수호자처럼

 
오늘 숲길을 걷게 된다면, 발밑의 이끼를 한 번 내려다봐 주세요.
 
가장 오래된 생존자가,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오늘도 지구를 돌보고 있습니다. 탄소를 품고, 질소를 만들고, 물을 머금고, 흙을 지키며. 4억 5천만 년 동안 한결같이.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작은 것이 큰 것을 지탱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끼가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From Forest, For Future
The Cycle of Nature, Our Conn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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