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지향 친환경주의자를 위한 글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계산대 앞에 섰습니다. "봉투 필요하세요?" 장바구니를 가져오려고 했는데, 오늘따라 갑자기 마트에 들른 거라 손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네, 하나 주세요." 비닐봉투를 받아 드는 순간, 또 그 느낌이 찾아왔습니다. 작은 실패감. 사소한 죄책감. ‘난 역시 안 되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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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 07, 2026
완벽지향 친환경주의자를 위한 글
퇴근길,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손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스마트폰을 꺼내 배달 앱을 열었습니다. 분명히 아침에는 오늘 꼭 집에서 해 먹겠다고 다짐했는데,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나니 요리할 기력이 남아 있질 않았습니다. 주문 버튼을 누르는 순간, 머릿속 한구석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또 일회용 용기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다가 현관 바닥을 봤습니다. 아침에 꼭 챙기려고 챙겼던 텀블러가 그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오늘도 회사에서 일회용 컵으로 커피를 마셨습니다. 두 잔이나. 분명히 어젯밤에 가방에 넣어두자고 생각했는데, 아침에 급하게 나오느라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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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분리수거를 하려고 재활용 쓰레기를 모아뒀습니다. 플라스틱 용기 하나를 집어 들고 뒷면을 봤습니다. 재활용 마크 옆에 작은 글씨들이 빼곡합니다.
 
‘뚜껑 분리 후 배출
내용물을 비우고 헹군 후
라벨 제거 후 배출’
 
잠깐, 이 라벨은 떼어지지 않는 종류인데. 결국 고민 끝에 일반 쓰레기 봉투에 넣었습니다. 하지만 찝찝한 마음은 좀처럼 가시질 않습니다.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계산대 앞에 섰습니다. "봉투 필요하세요?" 장바구니를 가져오려고 했는데, 오늘따라 갑자기 마트에 들른 거라 손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네, 하나 주세요." 비닐봉투를 받아 드는 순간, 또 그 느낌이 찾아왔습니다. 작은 실패감. 사소한 죄책감.
 
‘난 역시 안 되나 봐.’ ’이 정도 가지고 뭐가 달라지겠어.’ ’진짜 환경 생각하는 사람들은 나랑 다른 것 같아.’
 
혹시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비슷한 경험이 있으신가요? 환경을 생각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현실의 벽 앞에서 자꾸만 무너지는 느낌. 그래서 점점 "좋은 어른"이라는 이미지와는 멀어지는 것 같은 그런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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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에 대한 강박, 그리고 압박

 
SNS를 열면 완벽해(?) 보이는 사람들이 눈에 띕니다. 제로웨이스트 숍에서 유리병에 곡물을 담아오는 사람들. 플라스틱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돈된 냉장고 사진. "1년간 쓰레기 한 병"이라는 챌린지를 완수한 사람들의 인증샷. 손수 만든 천연 비누와 대나무 칫솔이 가지런히 놓인 욕실까지.
 
사진들을 보면서 생각합니다.
 
"나는 저렇게 못 하는데."
 
비건 식당을 찾아다니고, 모든 포장재를 거부하고, 옷도 중고로만 사고, 비행기는 절대 타지 않는 그런 삶. 그게 진짜 친환경인 것 같은데, 나는 아직 그 출발선에도 서지 못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100퍼센트 완벽하게 할 수 없으면, 차라리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어설프게 하다가 위선자처럼 보이는 것보다, 아예 안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나중에 제대로 준비되면 그때 해야겠다며 미룸만 쌓여갑니다.
 
바로 '0 아니면 100'이라는 이분법의 함정입니다. 조금이라도 실패하면 전부 무너진 것처럼 느껴지는 심리. 완벽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강박. 아이러니하게도, 이 완벽주의가 오히려 우리의 실천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제대로 된 친환경인이 될 준비가 안 됐어"라는 생각 때문에, 오늘 할 수 있는 작은 것조차 하지 못하게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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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게 배우는 완벽의 정의

 
잠시 숲을 떠올려 봅니다.
 
숲도 실패합니다. 태풍이 불면 오래된 나무들이 뿌리째 뽑혀 쓰러집니다. 긴 가뭄이 오면 계곡물이 마르고, 초록빛 잎들이 갈색으로 변해갑니다. 산불이 나면 수십 년 자란 나무들이 하룻밤 사이에 재로 변합니다. 누가 봐도 처참한 실패의 장면들입니다.
 
그럼에도 숲은 자책하지 않습니다. 나는 왜 태풍을 막지 못했을까, 가뭄에 버티지 못한 내가 한심해! 라고 스스로를 탓하지 않습니다. 숲은 그저 묵묵히 다시 순환할 뿐입니다.
 
쓰러진 나무는 어떻게 될까요? 그 자리에서 썩어가며 수많은 곤충과 균류의 터전이 됩니다. 이끼가 자라고, 작은 동물들이 집을 짓습니다. 몇 년이 지나면 그 나무는 완전히 흙이 되어, 새로운 씨앗이 뿌리내릴 수 있는 풍요로운 토양이 됩니다. 생태학에서는 이렇게 쓰러진 나무를 "유모목(Nurse Log)"이라고 부릅니다. 쓰러졌지만 끝난 게 아니라, 다음 생명을 품는 역할을 하죠.
 
 
가뭄에 마른 땅은요? 비가 다시 내리면, 오히려 더 깊이 물을 흡수합니다. 갈라진 틈 사이로 빗물이 스며들어 지하수를 채우고, 마른 줄 알았던 뿌리들이 다시 살아납니다.
 
산불로 검게 타버린 숲은요? 재가 된 나무들은 땅에 영양분을 돌려줍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어떤 씨앗들은 불의 열기를 받아야만 비로소 발아합니다. 파괴처럼 보였던 것이 사실은 새로운 시작의 조건이었던 겁니다.
 
숲에게 실패란 '끝'이 아닙니다. 순환의 일부입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완벽함을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자연이 보여주는 건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것, 멈추지 않고 방향을 유지한 채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제 태풍에 쓰러졌어도, 오늘 다시 순환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숲이 수천 년간 지켜온 방식인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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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다수의 불완전한 시도’

 
한 가지 질문을 던져봅니다.
 
1명이 완벽하게 100을 실천하는 것과, 100명이 불완전하게 10씩 실천하는 것. 어느 쪽이 더 큰 변화를 만들까요?
 
수학적으로만 봐도 답은 명확합니다. 1명의 100보다, 100명의 10이 모이면 1,000이 됩니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숫자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환경 문제는 소수의 완벽한 실천자만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철저한 제로웨이스터 100명이 모여도, 80억 인구의 일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하지만 80억 명 중 10억 명이 "오늘 하나만 바꿔볼까"라고 생각한다면, 그 물결은 거대해 집니다.
 
"나 하나쯤이야"라는 생각. 이해합니다. 내가 텀블러를 들고 다닌다고 해서 바다의 플라스틱이 줄어들 것 같지 않습니다. 내가 세제를 바꾼다고 해서 강물이 맑아질 것 같지 않습니다. 그 무력감, 충분히 공감합니다.
 
하지만 관점을 바꿔보면 어떨까요? "나 하나쯤이야"가 아니라 "나 하나라도"라고 생각해보는 겁니다.
 
100명이 세제 하나씩만 바꿔도, 매일 수천 리터의 물이 달라집니다. 1,000명이 일주일에 한 번씩만 텀블러를 챙겨도, 수천 개의 일회용 컵이 줄어듭니다. 그 1,000명 중 한 명이 당신이라면, 당신은 그 변화의 일부입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방향을 튼 사람"이라는 것. 그 자체로 이미 의미가 있습니다. 일회용품을 완전히 끊지 못해도, 일주일에 한 번 텀블러를 챙긴다면. 비건이 되지 못해도, 일주일에 하루 채식을 시도한다면. 제로웨이스트 삶을 살지 못해도, 배수구로 흘려보내는 물 하나를 신경 쓴다면.
 
당신은 이미 변화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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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제 하나부터 시작해도 괜찮아요

 
"그래서 뭘 하면 되는데?"라는 질문이 남습니다. 거창한 대답을 기대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저희가 드리고 싶은 답은 아주 작은 것입니다.
 
세제 하나.
 
매일 우리는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욕실을 청소합니다. 그때마다 배수구로 물이 흘러갑니다. 그 물은 하수관을 거쳐, 처리장을 지나, 결국 강으로, 바다로 흘러갑니다. 이 흐름은 멈출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한, 물은 계속 흘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물에 무엇이 섞여 흘러가는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거창한 변화가 아닙니다. 쓰던 세제만 바꾸는 것. 그것뿐입니다. 라이프스타일 전체를 뒤엎을 필요 없습니다. 냉장고를 비우고 비건으로 전환할 필요 없습니다. 모든 플라스틱을 거부하며 살 필요 없습니다.
 
오늘 배달 음식을 시켰어도 괜찮습니다. 텀블러를 까먹고 일회용 컵을 썼어도 괜찮습니다. 분리수거가 헷갈려서 대충 버렸어도 괜찮습니다.
 
대신, 집에 돌아와서 설거지를 할 때. 그 한 번의 설거지에서, 배수구로 흘러가는 물 한 번의 선택에서. 작은 변화를 시작해볼 수 있습니다. 그게 시작입니다.
 
하나를 바꾸는 것. 가장 쉬운 것부터 시작하는 것. 그것이 완벽하지 않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실천입니다. "모든 걸 바꿔야 해"라는 압박에서 벗어나, "하나만 바꿔볼까"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해보는 겁니다.
 
그리고 그 하나가 익숙해지면, 또 다른 하나를 더해볼 수 있습니다. 천천히, 하나씩, 자신의 속도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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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이미 시작한 사람입니다

 
이 글을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당신은 이미 시작한 사람입니다.
 
환경에 관심이 없었다면, 이 긴 글을 끝까지 읽지 않았을 겁니다. "더 나은 선택"을 고민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 문장을 보고 있지 않았을 겁니다. 당신이 여기까지 온 것 자체가, 이미 방향을 튼 증거입니다.
 
'좋은 어른'이란 무엇일까요?
 
저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좋은 어른은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잘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좋은 어른은 실패해도 다시 시도하는 사람입니다. 넘어져도 방향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입니다. 완벽하지 않은 자신을 인정하면서도, 그래도 조금씩 나아가려는 사람입니다.
 
어제 배달 용기를 열 개 썼어도, 오늘 한 번의 설거지에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물을 흘려보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내일은 텀블러를 챙길 수도 있고, 또 까먹을 수도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모레 다시 시도하면 됩니다.
 
1명의 완벽한 비건보다, 100명의 불완전한 시도가 세상을 바꿉니다.
 
완벽하지 않은 당신의 그 '지속적인 시도'가 우리에겐 가장 소중합니다. 오늘 실패해도 내일 다시 시도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자연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방식이고, 우리가 자연에게서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지혜입니다.
 
천천히, 함께 갑시다.
 
오늘 하루, 당신은 어떤 불완전한 시도를 하셨나요?
 

 
From Forest, For Future
The Cycle of Nature, Our Conn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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