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이 절기를 알아차리는 방법
일기예보를 확인하지 않아도, 달력을 넘기지 않아도 나무는 해마다 거의 같은 시기에 꽃을 틔웁니다. 우리 선조들은 이 리듬을 '절기(節氣)'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입춘, 경칩, 춘분, 곡우 — 자연의 움직임을 관찰해 한 해를 스물네 마디로 나눈 것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때'를 아는 걸까요?
Feb 08, 2026
일기예보를 확인하지 않아도, 달력을 넘기지 않아도 나무는 해마다 거의 같은 시기에 꽃을 틔웁니다. 매화가 먼저 오고, 개나리가 뒤따르고, 벚꽃이 그 다음 차례를 밟는 순서도 흐트러지는 법이 거의 없습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지휘자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 선조들은 이 리듬을 '절기(節氣)'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입춘, 경칩, 춘분, 곡우 — 자연의 움직임을 관찰해 한 해를 스물네 마디로 나눈 것입니다. 경칩이 되면 개구리가 깨어나고, 곡우가 되면 봄비가 곡식을 적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개구리와 곡식은 달력을 보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때'를 아는 걸까요.
특히 식물은 더 신기합니다. 동물은 이동이라도 할 수 있지만, 식물은 한자리에 뿌리를 내린 채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감지해야 합니다. 눈도, 귀도, 뇌도 없이. 그리고 놀랍도록 정확하게 해냅니다.
그 정확함에는 어떤 비밀이 담겨져 있을까요?
답을 찾아가다 보면, 수억 년에 걸쳐 완성된 놀라운 감각 시스템을 만나게 됩니다. 숲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훨씬 강인한 방식으로 시간을 읽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시계, ‘빛의 길이를 재는 식물’
식물이 계절을 읽는 첫 번째 열쇠는 '해가 떠 있는 시간'입니다.
서울 기준으로 동짓날의 낮은 약 9시간 30분, 하짓날에는 약 14시간 40분. 우리에게는 그저 "해가 길어졌네" 정도의 감각이지만, 식물은 이 차이를 놀라울 만큼 정밀하게 측정합니다. 그 역할을 하는 것이 '피토크롬(phytochrome)'이라는 단백질입니다.
피토크롬은 빛에 반응해 형태가 바뀌는 분자입니다. 낮 동안 빛을 받으면 활성 형태(Pfr)로 전환되고, 밤이 오면 다시 비활성 형태(Pr)로 돌아갑니다. 식물은 이 전환의 리듬을 통해 "지금 낮이 얼마나 긴지"를 파악합니다. 일종의 분자 수준의 빛 스위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빛의 길이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흐린 날도 있고, 그늘진 날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식물에게는 또 하나의 시계가 있습니다. 약 24시간을 주기로 돌아가는 생체시계(circadian clock)입니다. 사람에게도 있는 그 체내시계가 식물에게도 있는 겁니다. CCA1, TOC1 같은 유전자들이 서로를 활성화하고 억제하며 하루의 리듬을 만들어냅니다.

핵심은 이 두 시스템이 만나는 지점에 있습니다.
생체시계가 "지금은 저녁이어야 할 시간"이라고 말하는데, 피토크롬은 "아직 빛이 있다"고 신호를 보내면 — 식물은 '낮이 길어졌구나'라고 판단합니다. 생체시계의 예측과 실제 빛 신호가 어긋나는 바로 그 순간, 식물은 계절의 변화를 감지합니다. 과학자들은 이것을 '외적 일치 모델(external coincidence model)'이라고 부릅니다.
이 판단이 내려지면 식물 안에서는 연쇄적인 분자 신호가 이어집니다. CO(Constans)라는 단백질이 안정화되고, 이것이 FT(Flowering Locus T)라는 유전자를 활성화합니다. FT 단백질은 잎에서 만들어져 줄기를 타고 꽃이 피어야 할 부위까지 이동합니다. 식물학자들은 이 FT를 '플로리겐(florigen)', 즉 '꽃을 피우는 물질'이라고 부릅니다. 80년 넘게 가설로만 존재하다 2007년에야 실체가 밝혀진, 식물 생물학의 오랜 수수께끼였습니다.
🔗 관련 논문 : Molecular function of florigen
이 판단에 따라 어떤 식물은 낮이 길어질 때 꽃을 피우고(장일식물), 어떤 식물은 밤이 길어질 때 꽃을 피웁니다(단일식물). 시금치나 양파는 여름의 긴 낮을 기다리고, 코스모스나 국화는 가을의 짧아지는 낮에 반응합니다. 같은 빛을 받으면서도 서로 다른 계절에 꽃을 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더 흥미로운 점은 식물이 기온의 변덕에 쉽게 속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른 봄에 며칠 따뜻하다가 다시 추워지는 일은 흔합니다. 하지만 빛의 길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3월의 낮 길이는 구름이 끼든 비가 오든 1월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식물은 기온이라는 불안정한 신호 대신, 광주기라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계절 지표를 선택한 것입니다. 수억 년의 시행착오 끝에 내린 선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 질 녘의 빛 색깔이 달라지는 걸 우리는 눈으로 봅니다. 하지만 식물은 세포 하나하나가 그 변화를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시계, ‘겨울을 세는 나무’
빛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봄에 꽃을 피우는 많은 나무들 — 벚나무, 사과나무, 튤립 — 은 아무리 따뜻해져도 충분한 추위를 경험하지 못하면 꽃을 피우지 않습니다. 온실에서 겨울 없이 키운 벚나무가 꽃을 틔우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식물학에서는 이 현상을 '춘화(春化, vernalization)'라고 부릅니다.
놀라운 것은 식물이 단순히 "춥다"를 느끼는 게 아니라, "얼마나 오래 추웠는지"를 세고 있다는 사실. 비밀은 후성유전학(epigenetics)에 있습니다.

후성유전학이란 DNA 서열 자체는 바뀌지 않으면서도 유전자의 활성이 바뀌는 현상을 말합니다. 쉽게 비유하자면, 악보(DNA)는 그대로인데 어떤 악장을 연주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지휘자의 표식이 달라지는 거죠.
식물의 세포 안에는 FLC라는 유전자가 있습니다. 이 유전자는 평소에 활발하게 작동하면서 꽃이 피는 것을 억제합니다. 쉽게 말하면, FLC는 "아직 꽃 필 때가 아니야"라고 말하는 브레이크 역할을 합니다.
겨울의 추위가 몇 주에 걸쳐 지속되면, 식물 안에서 조용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VIN3라는 단백질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는데, 이 단백질은 며칠 정도의 추위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수 주 이상의 지속적인 저온(대체로 0~5°C)을 경험해야만 발현됩니다. 식물이 "이번 추위가 진짜 겨울인지, 아니면 잠깐 추워진 건지"를 분자 수준에서 검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VIN3가 충분히 만들어지면, 이 단백질은 FLC 유전자가 감긴 히스톤 단백질에 특별한 표식(H3K27me3)을 남깁니다. 이 표식은 FLC 유전자를 단단히 잠그는 역할을 합니다. 겨울이 길어질수록 표식은 더 많이 쌓이고, 브레이크는 점점 더 깊이 잠깁니다.
그리고 봄이 와서 기온이 올라가도, 이 잠금은 풀리지 않습니다. 한겨울에 쌓아 올린 분자적 기록이 세포 분열을 거치면서도 그대로 유지되는 것입니다. 덕분에 식물은 따뜻해진 봄에 안심하고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충분히 추웠으니, 이제 진짜 봄이다"라는 확신을 분자 수준에서 갖게 되는 셈입니다.
한 가지 더 놀라운 점이 있습니다. 이 겨울의 기억은 다음 세대에게 전해지지 않습니다. 씨앗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표식은 깨끗이 초기화됩니다. 새로 태어난 생명은 자기만의 겨울을 처음부터 다시 경험해야 합니다. 부모의 기억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계절을 읽어내야 합니다.
숲의 나무들은 겨울을 견디고 있었던 게 아니었습니다. 겨울을 세고 있었습니다. 충분히 추웠는지를 분자 하나하나에 기록하고, 그 기록이 차곡차곡 쌓여야 비로소 봄의 문을 여는 것이었습니다.

‘자연의 시계가 흔들리고 있다’ (벚꽃이 보내는 신호)
수억 년간 정교하게 작동해 온 이 시스템이, 지금 전례 없는 속도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일본 교토에는 9세기부터 이어져 온 벚꽃 개화 기록이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생물계절학 데이터입니다. 이 기록을 분석한 연구자들은 현재 교토의 벚꽃이 지난 1,200년 중 가장 이른 시기에 피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워싱턴 D.C.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관측됩니다. 1912년 일본이 우정의 상징으로 기증한 벚나무 3,000그루가 심긴 타이달 베이슨에서, 평균 개화일은 지난 수십 년 사이 약 2주 가까이 앞당겨졌습니다. 2023년에는 3월 14일, 100년 관측 역사상 가장 이른 기록을 세웠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기상청 자료에 따르면 서울의 벚꽃 평균 개화일은 1990년대 이후 뚜렷하게 앞당겨지는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제주도에서 시작해 서울까지 올라오는 벚꽃 전선의 북상 속도도 과거와 달라지고 있습니다.
봄 기온이 올라가면 개화가 빨라지는 것은 직관적으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겨울 기온도 함께 올라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많은 식물은 충분한 추위를 경험해야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겨울이 따뜻해지면 식물의 '겨울 카운터'가 제대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미국 국립생물계절학네트워크의 테리사 크리민스 박사는 "충분한 추위 없이는 오히려 개화가 지연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봄의 따뜻함은 꽃을 앞당기고, 겨울의 따뜻함은 꽃을 늦추는 — 두 힘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겨울 한가운데 15°C를 넘는 이례적 온기가 찾아오면 식물이 축적해 온 추위의 기록이 리셋되는 경우도 확인되었습니다. 식물의 입장에서는 "겨울이 끝났나?" 싶다가 다시 추위가 돌아오는, 혼란스러운 상황이 반복되는 셈입니다.
꽃이 피는 시기가 달라지면, 그 꽃에 맞춰 활동하던 수분 매개 곤충들과의 타이밍도 어긋나게 됩니다. 꽃은 피었는데 벌이 아직 오지 않았다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가 늘어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곤충이 깨어났는데 꽃이 아직 피지 않았다면, 곤충도 먹이를 잃게 됩니다. 식물과 곤충이 수백만 년에 걸쳐 맞춰 온 정교한 동기화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생태학자들은 이것을 '생물계절학적 불일치(phenological mismatch)'라고 부릅니다. 하나의 리듬이 흔들리면 숲 전체의 순환에 파장이 이는 것입니다.
숲의 시계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식물이 수억 년간 맞춰 온 리듬이, 불과 수십 년 만에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의 리듬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
식물의 계절 감지 시스템을 들여다보면, 하나의 사실이 선명해집니다.
우리가 자연의 시계를 흔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
인간이 그 시계를 이해하고 그에 맞춰 움직여야 한다는 것.
피토크롬과 생체시계의 정밀한 협업, 후성유전학적 겨울 기억 시스템, 세대를 넘으며 초기화되는 분자적 리셋 — 이 모든 것은 수억 년에 걸쳐 스스로 최적화해 온 결과물입니다. 누군가 설계도를 그려준 것이 아닙니다. 셀 수 없는 시행착오와 적응의 시간 속에서, 자연은 스스로 가장 정교한 해답을 찾아냈습니다. 보호해야 할 연약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이해하고 배워야 할 완성된 체계입니다.
동시에, 이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합니다. 겨울은 겨울다워야 하고, 봄은 봄다워야 한다는 것. 순환이 순환답게 이어져야 식물의 시계도 정확하게 돌아갑니다.
식물이 추위를 "세는" 과정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특정한 날짜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흐름이 끊기지 않는 것입니다. 낮과 밤이 교대하고, 추위와 따뜻함이 차례로 찾아오고, 그 리듬이 다음 해에도 되풀이되는 것. 이 순환이 유지될 때, 식물은 정확하게 "지금"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거창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만들고, 사용하는 것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자연으로 돌아가는지 그 흐름을 한 번 떠올려 보자는 얘기입니다. 자연의 순환과 우리 일상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가장 조용하고도 단단한 시작일지 모릅니다.
완벽할 필요는 없습니다. 식물도 매번 완벽하게 절기를 맞추는 것은 아니니까요. 때로는 너무 일찍 피기도 하고, 때로는 늦기도 합니다. 중요한 건 그들은 멈추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다음 계절에도, 또 그다음 계절에도 같은 리듬을 이어갑니다. 순환은 느리지만 멈추지 않는다는 것. 숲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가장 조용한 가르침은 아마 이것일 겁니다.
올봄, 가장 먼저 꽃을 피운 나무를 만나게 된다면 잠시 걸음을 멈춰보세요.
그 나무는 지난겨울의 추위를 세포 하나하나에 기록하고, 해가 조금씩 길어지는 것을 매일 측정하며, 오랜 시간 기다린 끝에 바로 '지금'을 선택한 겁니다. 서두르지도, 늦추지도 않고. 자기만의 시계가 가리키는 정확한 그 순간을.
From Forest, For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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