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로사, 커피 한 잔이 그리는 순환 4가지
하나의 제품이 세상과 맺는 관계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일까요? 이 질문에 22년째 자기만의 답을 쌓아가고 있는 브랜드가 있습니다. 2002년, 자판기 커피가 대중적이던 시절, 강원도 강릉의 한 밤나무 숲에서 스페셜티 커피를 내리기 시작한 테라로사(TERAROSA).
Feb 22, 2026
아침에 커피 한 잔을 내립니다. 필터 위로 뜨거운 물이 흐르고, 원두 사이를 통과한 물이 천천히 잔을 채웁니다. 우리는 보통 이 순간의 향과 맛에만 집중하죠.
그런데 이 한 잔이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나 많은 손과 흙과 시간이 필요했을까요?
지구 반대편 어딘가의 붉은 흙. 그 흙 위에서 몇 년을 자란 나무. 그 나무에서 열매를 따는 농부의 손. 수천 킬로미터를 건너온 생두. 그것을 볶고 갈고 내리는 사람들의 철학까지. 한 잔의 커피는 생각보다 훨씬 먼 곳에서 출발합니다.
하나의 제품이 세상과 맺는 관계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일까요?
이 질문에 22년째 자기만의 답을 쌓아가고 있는 브랜드가 있습니다. 2002년, 자판기 커피가 대중적이던 시절, 강원도 강릉의 한 밤나무 숲에서 스페셜티 커피를 내리기 시작한 테라로사(TERAROSA). 이탈리아어로 '붉은 흙'을 뜻합니다. 커피나무가 가장 잘 자라는 토양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테라로사의 김용덕 대표는 말합니다. 기업의 목표는 '큰 회사(Big Company)'가 아니라 '좋은 회사(Good Company)'라고요. 처음 이 말을 접했을 때, 단순한 경영 철학을 넘어 어쩌면 일종의 순환 원리일 수도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자연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섭리를 테라로사의 경영 방식에서 발견했습니다.
1. 붉은 흙 위의 약속
#산지 와의 순환
테라로사는 연간 500~600톤의 스페셜티 커피 생두를 세계 12개국, 약 130개 품종에 걸쳐 직거래로 들여옵니다. 국내 스페셜티 업계에서 최대 규모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테라로사는 일반 시세보다 3~4배 높은 값으로 생두를 사오면서도, '공정무역'이라는 말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김용덕 대표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인증 라벨을 마케팅에 활용하는 것보다, 산지 사람들의 삶의 질을 위해 실제적인 도움을 어떻게 줄 수 있는지 고민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 말은 곧 실천으로도 증명됩니다. 산지를 방문할 때 현지 업자에게 호텔이나 편의를 제공받지 않고 모든 비용을 자부담합니다. 중미의 수출업자와 농부들을 모아 일주일간 세미나를 열어, 수확 과정을 함께 나누고 품질 개선 방법을 교류하기도 하죠. 인증서 한 장이 아니라, 해마다 반복되는 만남과 대화로 관계를 쌓아가는 방식입니다.
이 관계는 커피 너머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커피가 만들어지는 ‘전 과정에 관여’
르완다에는 부모를 도와 생계를 유지하느라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테라로사는 '마헴베 프로젝트'를 통해 이 아이들에게 교복을 기증했습니다. 작은 것 같지만, 교복 하나가 등교 동기와 출석률을 바꿔놓았습니다.
엘살바도르에서는 커피 수확 시즌이 되면 아이들이 방치되거나 부모와 함께 노동에 투입되곤 했습니다. '말라카라B 프로젝트'는 이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를 지어주는 프로젝트였죠. 수확이 끝나면 사라지는 캠페인이 아니라, 아이들이 머물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을 남긴 겁니다.
'나센테스(Nascentes)' 프로젝트는 중남미의 여성 커피 생산자들을 교육합니다. 커피 품질이 올라가면 농가 소득이 올라가고, 소득이 올라가면 다시 교육에 투자할 여력이 생깁니다. 콜롬비아의 'The Pickers Project'는 커피를 직접 따는 사람들에게 적정 임금과 전문 훈련도 제공하죠.
이 프로젝트들은 각각 다른 나라, 다른 문제를 다루지만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테라로사가 단순한 원두 구매자가 아니라, 커피가 만들어지는 과정 전체에 관여하는 파트너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가장 눈에 보이는 순환 구조는 트리플래닛과의 협업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르완다 농장에서 생두를 직접 들여오고, 강릉에서 드립백을 만들어 판매합니다. 그 수익금은 다시 르완다 농장에 커피나무와 가공센터를 지원하는 데 쓰입니다. 그리고 그 나무에서 자란 열매가 다시 한국으로 옵니다. 커피 한 잔의 수익이 산지로 돌아가 나무가 되고, 그 나무가 다시 커피가 되는 것.
이 협업에 앞서 진행된 네팔 'Make Your Farm' 캠페인에서는 참여 농가의 평균 소득이 2배 증가하고, 커피 생산량이 2톤 늘어나는 실질적 성과가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숲에서는 낙엽이 거름이 되어 새 나무를 키웁니다. 테라로사에서는 커피 한 잔의 수익이 산지로 돌아가 다시 커피나무가 됩니다. 이렇게 겹쳐 생각해 보니, 순환의 원리는 자연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들여다 보니, 테라로사가 그리고 있는 순환의 구조는 꼭 산지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었습니다. 한 잔의 커피가 우리 손에 닿기까지, 그 '사이'에서도 순환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2. 나무를 베지 않는 커피 필터
#제품 설계 의 순환
커피를 내릴 때 무심코 쓰는 종이 필터. 국내 커피 필터 시장은 약 4조 원 규모인데, 그중 90%가 일본산 펄프 제품이었습니다. 펄프, 즉 나무를 베어 만든 필터입니다.
테라로사는 여기서 질문을 던졌습니다.
"커피 한 잔을 위해 꼭 나무를 베야 할까?"
PLA 소재 전문 기업 에콜그린텍과 공동으로, 옥수수에서 추출한 생분해성 소재로 커피 필터를 개발했습니다. 옥수수에서 전분을 분리하고, 포도당으로 발효시킨 뒤, 젖산으로 응축해 만든 PLA 부직포입니다. 환경인증 EL724를 받았고, 토양에 매립하면 약 60일 만에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필터가 '환경을 위해 성능을 양보한 제품'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기존 펄프 필터에서 나던 종이 냄새와 찌꺼기가 사라져, 커피 본연의 풍미가 더 잘 살아납니다. 더 좋은 경험을 설계했더니 그것이 환경에도 좋았던 셈.
이런 접근은 다른 제품에서도 이어집니다. 테라로사의 카페라테 RTD는 빨대 없이도 음용이 가능한 종이팩 디자인을 채택합니다. "플라스틱을 줄여주세요"라고 소비자에게 요청하는 대신, 제품 설계 단계에서 구조적으로 플라스틱이 필요 없게 만든 겁니다. 불편을 전가하지 않는 환경 설계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더 먼 미래를 위한 투자도 있습니다. 테라로사는 기후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커피 품종 연구를 위해 글로벌 연구기관 WCR(World Coffee Research)에 꾸준히 기부와 참여를 이어가고 중입니다. "어떤 농업이든 생산자에게 돌아가는 직접적인 수익이 보장되지 않으면 지속가능성도 없다"는 것이 이 참여의 바탕입니다.
스코그링은 '숲처럼 강하고 안전한' 세정력을 이야기할 때, '순함'이 아니라 '강한 정화 시스템'이라는 말을 씁니다. 희생이 아니라 더 나은 경험. 테라로사의 PLA 필터에서도 같은 결이 느껴졌습니다. 환경을 위해 무언가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것을 만들었더니 자연스럽게 환경에도 이로운 방향이었다는 것.
제품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설계를 만들었다면,
그 제품을 만드는 사람들의 삶은 어떨까요?
"좋은 회사"의 안쪽 풍경
#조직 의 순환
테라로사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좋은 회사'라는 말이 슬로건이 아니라 구체적인 구조라는 걸 알게 됩니다.
청소 직원을 포함해 전 직원이 정규직입니다. 매년 전 직원을 해외연수에 보냅니다. 사업이 어려워 사채를 써야 했던 시기에도 이 복지만큼은 양보하지 않았다고 알려집니다. 자녀 교육비 전액 지원, 매일 식사 제공, 지방 매장 직원에게는 1인 숙소까지 지원합니다.
바리스타가 되는 과정도 독특합니다. 6개월간 이론과 실전 교육을 마쳐야 비로소 바에 데뷔하고, 메인 바리스타가 되기까지 걸리는 기간은 약 2년 남짓. 빠르게 인력을 투입하고 교체하는 방식이 아니라, 한 사람이 깊이 자라는 데 필요한 시간을 기다려주는 방식입니다.
테라로사가 가맹점 없이 100% 직영만 고집하는 이유도 여기에 닿아 있습니다. 김용덕 대표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맹점주가 자살하든 굶어죽든 본사 경영자 한 사람의 성공만 중요한 것은, 내 성공의 기준에 맞지 않습니다."
날 것 그대로의 문장이지만, 그래서 더 무겁게 남습니다. 사회 구성 요소들의 삶의 질이 개선되지 않으면 기업은 존재 가치가 없다는 신념이 직영이라는 구조로 실현되고 있는 셈입니다.
숲에서는 어떤 나무도 혼자 자라지 않습니다. 균근이라는 균류가 나무의 뿌리를 서로 연결하고, 큰 나무가 작은 나무에게 양분을 나누기도 합니다. 생태학자들은 이것을 '나무의 인터넷(Wood Wide Web)'이라고 부르죠. 조직도 같은 원리로 작동할 수 있다는 걸, 테라로사는 22년간의 실천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성원이 건강해야 브랜드가 건강하고, 브랜드가 건강해야 고객에게 좋은 커피가 돌아갑니다.
4. 이야기를 쌓는다는 것
#콘텐츠 의 순환
테라로사가 독특한 점은, 자신들의 철학을 단발 캠페인이 아닌 콘텐츠 자산으로 쌓아간다는 점입니다.
《커피 스페이스 테라로사》, 《테라로사 쿡북》, 《테라로사 커피 로드》, 《테라로사 커피 라틴 로드》. 커피 브랜드가 이 정도의 출간물을 낸다는 것 자체가 정말 이례적입니다. 이 책들은 흔히 떠올리는 제품 카탈로그, 홍보용 자료를 넘어섭니다. 산지의 풍경, 농부와의 대화, 공간을 만드는 과정, 커피 문화의 역사 등이 진솔하게 담겨 있습니다. 브랜드의 경험이 텍스트라는 토양 위에 한 겹씩 쌓이는 겁니다.
온라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테라로사 라이브러리(terarosalibrary.com)는 커피 산지 탐방기부터 기후변화와 커피의 미래까지를 아티클 형태로 발행합니다. 특히 "우리는 왜 E(환경)·S(사회)·G(경영)를 이야기하는가?"라는 글을 직접 발행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ESG를 외부에서 요구받아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질문하고 답하는 브랜드라는 뜻이니까요.
수십, 수백 계절의 합이 숲인 것처럼, 오랜 시간 낙엽이 쌓여 만들어진 토양 위에서야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숲처럼. 테라로사의 이야기 역시 이렇게 22년 동안 한 겹 한 겹 쌓아왔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일회성 '캠페인'과 지속되는 '문화'의 차이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순환의 지도 위에서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봅니다.
하나의 제품이 세상과 맺는 관계는 어디까지일 수 있을까?
테라로사의 22년을 따라가 보니, 4개의 순환이 겹쳐져 있었습니다.
산지의 흙에서 시작된 커피가 농부의 손을 거쳐 한 잔이 되고, 그 한 잔의 수익이 다시 산지의 나무가 됩니다. 옥수수에서 태어난 필터가 커피를 내리고, 60일 후 다시 흙으로 돌아갑니다.
직원의 성장이 고객의 경험이 되고, 그 경험이 브랜드의 건강함이 되어 다시 직원의 자부심으로 이어집니다. 철학이 콘텐츠가 되고, 콘텐츠가 문화가 되어 다시 브랜드의 토양을 기릅니다.
어쩌면 지속가능성이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모든 것이 어딘가로 돌아가는 구조를 만드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방향이 순환을 향하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시작일 겁니다.
From Forest, For Future
The Cycle of Nature, Our Conn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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